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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건설업] 브루탈리스트

김예은 뉴스크루(1기) 2025.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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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건설업 시리즈] 연재를 맡은 건설 ON팀의 김예은입니다. 본 연재는 건설업 취업준비생들이 건설을 조금 더 쉽고, 새로운 영역에서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하는 취지에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이어질 [영화로 보는 건설업] 시리즈는 ‘건설’이라는 영역 내 다양한 주제를 다루어보고자 합니다. 영화를 보고 글을 읽으시면 더욱 몰입해서 글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일부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늘 다룰 작품은 올해 2월에 개봉한 영화 ‘브루탈리스트’ 입니다. 본 작품은 215분의 러닝타임을 자랑하는 호흡이 긴 영화인만큼 본 연재에서 주요하게 다룰 내용은 3가지입니다.

 

*본 기사의 본문은 문어체로 작성되었습니다. 자연스러운 전달을 위한 의도적 구성이니 편하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예술인가 시대착오인가” – 건축가 라즐로의 삶과 선택

 

간략한 영화 줄거리 요약

영화 ‘브루탈리스트’의 배경은 1947년 2차 세계대전 후, 전쟁의 상흔을 안고 미국에 정착한 헝가리 출신 유대인 건축가 ‘라즐로 토스’를 주인공으로 시작한다. (*영화 속 주인공은 실존인물은 아님)

헝가리 출신 유대인 건축가인 주인공 '라즐로 토스'

 

독일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아 이민자 신분으로 미국 땅을 밟는 그는 전쟁 전, 미국에 정착해 가구점을 운영하는 사촌 아틸라의 도움을 받는다. 가구점 창고에서 머물며 가구 디자인을 돕는 그는 부유한 사업가 해리슨의 서재 리모델링을 도우며 재기를 꿈꾼다.

완성된 해리슨 서재

 

하지만 의뢰를 받고 완성까지 한 부유한 사업가 해리슨의 서재 리모델링 대금을 받지 못하고 사촌으로부터 쫓겨나게 된다. 이후 사업가 해리슨이 서재를 재평가하고 다시 주인공 라즐로를 찾아오며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부유한 사업가 해리슨

 

해리슨은 주인공 라즐로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기리는 문화센터 건립이라는 대형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덕분에 이민자 출신 건축가 라즐로는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이어 아내와 조카도 재회하게 되지만, 시대와 공간 그리고 빛을 하나에 담아내려는 그의 건축 설계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예산마저 초과하게 된다. 끝으로 해리슨이 운영하는 사업장에서 사고가 발생하며 막대한 보상금이 들어가며 공사는 중단되고야 만다.

‘브루탈리스트’란 가공되지 않은 그대로의 존재를 추구하는 사람

본 영화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기에 앞서, ‘브루탈리스트’ 라는 영화의 제목부터 파헤쳐보자

제목에서부터 브루탈리스트(Brutalist)란 ‘브루탈리즘(Brutalism)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알 수 있다. 브루탈리즘은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유행한 건축 양식이다. **브루탈리즘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솔직함’**이 핵심이다. 브루탈리즘이라는 용어는 ‘가공되지 않은 콘크리트’ 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 베통 브뤼트(Béton brut)에서 유래되었다.

왜 하필 브루탈리즘일까?

그렇다면 왜 하필 브루탈리즘인가에 대해 의문이 든다. 왜 노출 콘크리트가 성행했을까? 정답은 바로 많은 도시를 폐허로 만든 세계 2차대전에서 비롯된다. 당시 2차 대전으로 많은 도시가 폐허가 되면서 사무실, 학교, 교회 등 건축물을 빠르게 재건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전쟁 후 많았던 값싼 콘크리트와 철근을 사용했고 이것이 브루탈리즘 건물을 만드는 주재료가 되었다. 저렴한 건축비용과 실용성이 중요했던 시대적 배경과 맞물리며 브루탈리즘이 등장한 것이다.

 

*한 줄 요약 : 전쟁 후 빠른 도시 재건을 위해 등장한 재료 콘크리트와 철근이 브루탈리즘이 시작된다.

건축가 라즐로의 삶과 브루탈리즘

그렇다면 라즐로의 삶과 브루탈리즘은 어떠한 관계인가? 라는 2차적 질문이 이어진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유럽 이민자의 정서를 대변하기 위함 이라고 답할 수 있겠다. 한 인터뷰에서 브래디 코베 감독은 “미국에서 구현된 브루탈리즘은 주로 이민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건축 양식이었으며, 그 규모와 스케일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받고자 했다" 라고 전한 바 있다. 이처럼 50년대 미국에서 브루탈리즘은 이민자들처럼 멸시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흉물스럽다며 철거해달라는 민원이 빗발칠 정도로 이해받지 못한 처지였다. 주인공인 이민자 건축가인 라즐로도 노출 콘크리트 건축물을 설계하고 시공하며 건축물은 올라감과 동시에 라즐로의 내면도 파괴되는 장면을 중첩적으로 보여준다.

 

*한 줄 요약 :  유럽 이민자들의 정서를 브루탈리즘 매개로 영화에 표현한다. 브루탈리즘과 이민자들을 건축가 라즐로의 삶으로 표현하며 영화가 전개된다.


🏗️ 이상과 현실 사이 – 라즐로의 설계가 마주한 벽

건축가 라즐로와 건축주 해리슨의 관계

이민자 출신 건축가 라즐로의 시선에서 본 영화 속 건축가의 위치는 본 기자가 유사한 건축 전공자로써 영화를 보는 내내 건축의 취급에 대해 고민이 많아지게끔 했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팠다’ 라는 표현이 적합할 수도 있겠다. 그만큼 노골적으로 당시 얼마나 건축가들이 저평가 받았는지 영화내내 보여준다.

미국 현대건축의 대부로 불리는 건축가 필립 존슨은 잘 알려진 그의 건축 글래스 하우스만큼이나 도발적인 말을 남겼다. 보통 ‘건축가는 창녀다’라고 짧게 알려져 있지만 전체 문장을 소개하면 ‘건축가는 상류층의 창녀다’ 라고 표현된다. “매춘부가 고객을 거절하는 것처럼 건축가도 프로젝트를 거절할 수 있다. 하지만 **각자의 직업에서 살아남으려면 둘 다 누군가에게 ‘예’라고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이다. 이런 말을 했던 건축가 필립 존슨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일찍 유산을 상속받았고 그 돈으로 건축주가 되어 사면이 유리인 글래스 하우스를 설계하는 것으로 건축가 경력을 시작했다. 이런 건축가가 한 말이라는 점이 다소 의아하지만 어쨌든 그의 말에는 중요한 설명이 빠져 있다. 건축가와 매춘부 둘 다 매력을 팔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 평론가이자 건축가인 윤웅원의 말을 빌리자면, ‘특정한 직업을 가진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는 많지만 직업이 가진 구조적인 특성을 내재화한 영화를 본 기억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서 <브루탈리스트>는 건축가는 상류층의 창녀라는 문장에서 시작한 영화처럼 보인다.’ 라고 표현한다. 이처럼 본 영화에서도 건축주인 해리슨이 새로운 건축가를 데려올 때, 돈이 없다며 건축을 중단할 때 등 강하게 반발하는 건축가 라즐로의 모습의 대치되어 드러난다.

 

*‘건축가는 상류층의 창녀다’ 라는 표현으로 시작하는 영화 브루탈리스트(영화평론가 윤웅원)

자신의 설계에 대해 3m 디테일을 두고 주인공이 씨름을 벌이는 장면


🤨 버려진 이상향 – 브루탈리즘이 남긴 질문과 답

주인공 라즐로를 통해 본 시대사조의 풍자

본 영화의 주인공인 라즐로는 유대인 건축가 라는 명찰 내에서 이리저리 끌려다닌다. 극 중에서 그가 어디에서 영감을 받았는지, 어떻게 작업을 하는지는 나와있지 않고, 주제 의식을 전하기 위한 에피소드를 나열하며 영화의 논리 속에서 끌려다닐 뿐이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서는 조카 조피아의 연설로써 본 건축물이 독일의 수용소에서의 기억을 담아냈다며 라즐로의 건축을 그저 시오니즘의 예술로 한계를 지으며 2차적으로 폭력을 가하고 만다. 그렇기에 영화는 어머니를 기리기 위한 문화센터 건축에서 라즐로가 자신이 있었던 독일의 수용소의 기억을 담아낸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한 번 더 들게 하며, 가상인물인 라즐로에 대한 호기심보다도 당대 시대사조를 드러내며, 동시에 폭력적인 역사 ‘아메리칸 드림’과 ‘시오니즘’(유대인 민족주의 운동)을 동시에 비판한다.

영화 스틸컷

이민자의 나라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

영화의 도입부터 자유의 여신상을 비추며 시작한다. 라즐로가 증기선을 타고 도착하여 본 여신상은 거꾸로 처박힌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는 라즐로가 가진 아메리칸 드림이 얼마나 허상인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하지만 라즐로는 1막에서는 해리슨에게 천재성을 인정받아 재기를 꿈꾸지만 2막부터는 자본가로서의 탐욕과 이민자에 대한 멸시를 드러내는 해리슨을 통해 미국 자본주의의 탐욕과 천박함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 모 평론가는 미국이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교묘하게 거래를 하다 쓸모가 다하면 자본주의 시장논리에 의해 타지인을 버리는 모습이 이민자들로부터 시작된 나라 미국의 이중성을 보여준다고 평한다.

‘여정이 아닌 목적지’ 태도의 브루탈리즘

 본 영화에 대해 깊이있게 분석하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윤웅원(건축가)의 글을 발췌하여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윤 평론가는 영화에 대해 이렇게 평론을 쉽게 풀어 전달하자면, 영화 속 라즐로의 건축을 정의하는 문장은 ‘여정이 아니라 목적지’이다. 이 문장을 보면, 우리는 때때로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도그마 즉, 신념에 빠져 잊고 지내던 결과, 도달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잊고 지낸다고 말한다. 또 윤 평론가가 이전에 언급했던 ‘건축가는 상류층의 창녀다’ 라는 말을 남긴 건축가 필립 존슨도 20세기 전체를 관통하는 세 가지 중요한 건축사조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 모두에서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이처럼 건축가 필립 존슨도 자신의 업을 그저 창녀라고 표현했지만, 이는 결과에 도달하고 싶은 욕구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문장이며, 필립 존슨 또한 마치 당대의 경향들을 수집하는 것처럼 새로운 시대에 맞추어 기꺼이 자신의 몸을 던진 인물로 보여진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건축가 라즐로가 그토록 닿고 싶어한 것은, 미국이라는 땅에서 이민자의 신분으로 만들어낸 자신의 건축물이라는 결과였을 것이다. 그렇게 이 영화를 통해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명언에 빠져, 가끔 결과물을 완성하는 기쁨 좌시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된다. 결국 건축가는 창녀라는 평을 했던 건축가 필립 존슨조차도 건축사조를 관통하며 역할을 할만큼, 결과물을 만드는 역할에 충실했던 것이다. 이처럼 본 영화가 시사하는 점 중 하나는 건축가와 디자이너는 어쩔 수 없는 태도의 브루탈리즘, 목적지가 중요하게 다가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가장 인상깊은 장면 중 하나


영화 ‘브루탈리스트’ 세 줄 요약

1. 시대적 배경에 따른 건축사조인 브루탈리즘이 돋보이는 영화

2. 건축주 해리슨과 건축가 라즐로의 관계성에서 건축가의 고충을 잘 반영한 영화(유현준 건축가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서 본 장면을 보고 너무 공감이 가는 부분이라 할 정도 !)

3. 브루탈리즘 사조에 대해 자세하게 알고 싶다면 추천하는 영화이자, 영화의 미장셴과 디테일이 살아있어 보는 내내 눈이 즐거운 영화

*영화 표지마저도 바우하우스의 그래픽 디자인을 참고한 미적 감각이 돋보인다.

 

본 영화에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전달해야할까' 하는 고민이 많이 들었습니다. 다만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도, 이해할 수 있고, 영화를 본 분들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한 번 더 정리하는 느낌으로 보시면 좋겠습니다. 처음 이 영화를 접한 분이시라면 기사를 보시고, ‘브루탈리즘’ 혹은 ‘브루탈리스트’에 대해 관심을 갖고 영화 감상까지 이어지는 기회가 되시면 좋겠습니다. 다음 연재로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참고문헌 정리]

[사진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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